포항--첫 휴가....

포항으로 가는 길은 작년에 월남으로 갈 때의 역순이었다. 기차로 포항역까지, 다시 트럭으로 포항 사단까지 가서 배치 받은 병사에 여장을 풀었다. 여기서 일주일간 대기 후 전원 보름간의 휴가를 가게 된다고 했다. 아~ 드디어 그동안 여러번 속아왔던 휴가를 이제야 정말 가게 되는구나, 설마 이번에도 거짓말은 아니겠지??

우리는 갑자기 당하는 추운 기후에 적응하며 하는 일 없이 일주일이 가기만 기다렸다. 이틀이 지나자 입술이 트고 갈라지고 부어서 밥을 먹기가 힘들고 고통스러웠지만  그래도 저마다 그리던 고향을 찾아갈 기대에 마음이 한 껏 부풀어 있었다.
그 일주일 대기하는 동안에도 월남에서 포악했던 3소대장은 각종 트집을 잡아 쫄병들 패기에 정신이 없었다.

출발 전날 부대배치 발표가 있었다. 9365xxx 상병 신완식, 교육기지~!   내가 앞으로 제대할 때까지 근무할 곳은 진해였다.
해병들은 진해 신병훈련소를 수료하고 떠날 때 "다시는 이쪽을 향해서는 오줌도 누지 않겠다"는 말을 농담 삼아 흔히 한다. 물론 나도 그랬다. 그런데 이 무슨 운명인가? 월남으로 가기전에 행사부대에 뽑혀 훈련소로 들어 온적이 있었는데 이젠 또 아예 근무를 진해에서 하란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어딜 가든지 군대생활은 비슷할 테니까...

다음날 드디어 입대후 첫 휴가를 출발하였다. 서울 쪽으로 갈 몇 명, 그러니까 월남에서 귀국박스를 같이 사용한 동료들끼리 생전 처음으로 고속버스로 경부고속로를 달려 보았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때는 고속버스에 예쁜 안내양이 있었고 신문도 나누어 주고 사탕도 주고, 안내 방송도 했었다. 또 지금의 비행기 여행처럼 스위치만 눌러 안내양이 오면 물 한컵을 시키기도 하던 시절이었다.
또 그레이하운드라는 회사의 고속버스는 차안에 화장실도 있었다.

우리들은 서울역 뒤에 있는 서부역으로 가서 월남에서 부쳤던 귀국박스를 찾아 뚜껑을 열고 각자의 물건을 꺼내 갖은 후 다음날
동작동 국립묘지 태진이의 묘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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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동 국립묘지....

제대후 첫 현충일(1973.06.06) 동작동 국립묘지 다음날 나는 태진이가 있을 동작동 국립묘지로 갔다.  안내소에서 위치와 묘비번호를 쉽게 알 수 있었다.    
그 곳에는 월남 전사자 묘역으로 수없이 많은 월남 전사자의 묘비가 있었다.  드디어
해병상병 김태진의 묘 라고 새겨진 태진이의 묘비를 보는 순간 가슴이 찡~ 하고 아려 왔다.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분노도 치밀었다.

곧 이어 월남 전우들이 모였다. 우리는 다함께 태진이의 명복을 빌었다.
그날 우리는 매년 현충일에 이곳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그러나 그 약속은 제대 후 두 번 정도 지켜 지는 듯 하더니 그 후에는 지금까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나 혼자만 삼십년이 넘도록 매년 태진이의 가족이 다녀간 흔적을 보아 왔을 뿐이다. 태진이의 가족이 다녀간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매번 나라에서 기본으로 해주는 꽃이 아닌 아름다운 꽃이 듬뿍 꽃혀있기 때문이다.

나는 사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번도 걸러 본 일이 없이 매년 현충일이면 태진이를 찾는다.  나에게는 신기하게도 그때마다 하늘이 태진이에게 갈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제대하기 전에도 그 때 특별 포상휴가를 받아서 태진이한테 갈 수 있었으니까.... 처음 몇 년간은 묘비앞에 메모를 써 놓기도 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ㅠ.ㅠ
그러던 중 삼십년이 지난 작년 11월 26일(2000.11.26) 정말 극적으로 월남전우 230기 신현기를 재회했다.  그래서 지난 현충일에는 신현기 부부와 우리 부부 넷이서 태진이 한테 갈 수 있었다.
우리는 오리지날 진로 소주(두꺼비)를 푸짐히 따라 주었다. 태진이가 매우 반가워 했을 것이다....


태진이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03-3-3791(묘역/묘판/묘비)에 안장되어 있다. 맨위 목차로 가기
 

진해 해병통신교육대.... 진해 해병통신교육대 '72년 7월...

입대한지 19개월 반 만에 얻은 꿈같은 보름간의 휴가도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고 진해로 내려갔다....
최종적으로 내가 배치된 곳은 "해병교육기지사령부 상륙전학교 해병통신교육대"였다.  이곳은 신병훈련소 영내가 아니고 진해시 동쪽 외곽 장천에 위치한 독립 부대로 내가 입대하던 해 8주 신병훈련 후 4주간 후반기교육인 유선통신 교육을 받은 곳이다.  이제는 피교육자가 아닌 실무병으로 근무하게 된 것이다.
통신교육대 바로 아래는 해군 UDT교육대의 일부 건물이 있었고, 그 반대편에는 차량 운전 및 정비를 교육하는 해병수송교육대가 있었다.

내가 앞으로 제대할 때까지 근무해야 할 해병
통신교육대에는 장교, 하사관, 병을 막론하고 나보다 고참은 전원 100% 월남을 다녀왔다는 사실에 나는 놀랐다. 내가 월남을 갔다 왔다는 것이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당시 교육대에서 지금 기억해 낼 수 있는 사람은,  해사 출신 통신교육대장 유창식 소령,
선임하사 이익관 상사, 교관 이명수 중사, 집이 진해였던 김진득 하사 정도이다....  이중에서 특히 이명수 중사는 집에 월남전 때 적의 총알이 관통한 구멍이 뚜렸한 위장복 윗도리를 벽에 걸어두고 있었다. 이 이명수 중사를 198x 년에 우연히 TV에서 기자의 인터뷰에 응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 때 화물차를 운전하고 있었다. 그때 아~ 제대를 했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렇게 해병대에 입대하여 신병훈련을 받고 그다음 과정인 병과에 따른 후반기 교육을 받고 떠났던, 다시는 이쪽을 보고 오줌도 누지 않겠다던 바로 그 진해에서 계속 오줌을 누며 약 13개월에 걸친 근무를 해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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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2 + 4 = 6개 ~@.@~....

  1972년 5월 승공음어 경연대회를 연다는 공문이 접수되었다. 서울 해병대사령부 대회에 앞서 김포 여단, 포항 사단, 진해 교육기지에서 각각 대회를 열어 1, 2등을 서울 사령부 대회에 출전시킨다는 것이었다. 우리 통신교육대에서는 그 당시 당연히 아주 민첩하고 똑똑한 내가 뽑혔다.(진짜 =^.^=) 시합 내용은 평문을 음어로 조립하고 음어문을 평문으로 해독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빨라도 틀리면 감점이 되기 때문에 빠른 사람이 반드시 이기는 건 아니었다.별 2개 ~@.@~
진해에서는 싱겁게 내가 1등을 했다. 별 어려운 상대가 없었다. 이때 별 두 개짜리 상장과 함께 부상으로 라이터를 받았는데 내 생전 별을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두 개와 악수까지....  사령관 얼굴이 뿌옇게 되어 잘 보이지 않고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서 있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 내가 근무하던 해병통신교육대의 교육대장이 소령이었으니....
이제 진해 보안대에서의 합숙훈련과 서울 출전이 남았다. 그러나 교육대에서는 행정병의 자리를 그렇게 비워 둘 수 없다며 합숙을 불허했다. 할 수 없이 과업시간 이후에 나 혼자 음어조립/해독 연습을 해야 했다.  

우리 시합 참가팀은 서울 시합 전날 상경했다. 우리의 인솔책임자인 보안대 하사의 지시에 따라 각자 헤어져 내일 아침 후암동 해병대사령부 정문앞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덕분에 그날 집에서 하룻밤을 보낼 수 있었다.

다음날, 1972년 05월 23일 사령부에는 전국에서 암호와 음어별로 쟁쟁한 멤버들이 모여 들었다. 혹시 아는 얼굴을 기대했으나 아무도 없었다.

드디어 시합이 시작되었다. 음어자재는 아주 오래전에 쓰던 낯선 것이 교부되었다.
그러니 미리 암기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오로지 판단력, 요령, 눈치, 순발력 그리고 정확성만이 필요할 뿐이었다.
첫째 시간 음어 해독 시합, 혼심의 힘을 다하여 해독을 해 나갔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는 소리가 내귀에 크게 들려왔다. 다른 사람이 먼저 손을 들까봐 온갖 신경이 아찔아찔~했다. 와~! 별 4개 ~@@.@@~ 드디어 숨 막히는 해독이 끝나자마자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제일 먼저였다. 그러나 불과 몇초 차이로 여기저기서 손들이 올라갔다.

다음번엔 음어 조립시간, 역시 이번에도 내가 제일 먼저 손을 들었다.  그러나 오답 감점 때문에 내가 장담만 할 수는 없었다.  초조하게 발표를 기다렸다.

드디어 발표, 1위, 교육기지 상병 신완식!  와~! 내가 1등, 우승이었다. 이럴 수가~!
얼마후 시상식, 내 생전 별 앞에 서기 두 번째, 이번에는 별이 네개였다.
역시 눈앞이 뿌옇고 다리가 정신없이 흔들리고... ~@.@~ ㅎ ㅎ ㅎ
상장과 상품을 수여한 후, 사령관이 물었다.

"귀관, 부대장이 누군가?"
"
네!, 해병통신교육대장, 소령 유창식 님입니다~!" 아주 기합들게 대답했다.

상품은 소형 트랜지스터 라디오였다. 지금은 별거 아니지만 그 당시에는 제법 괜찮은
물건이었다.

진해로 내려와 진해 교육기지사령관한테 자랑스런 수상 신고를 했다. 매우 흡족해 하는 사령관의 얼굴이 그제서야 바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 사령관의 집무실을 처음 볼 수 있었는데 매우 크고 아주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또, 바닥에는 카페트가 깔려 있었다.
신고를 받은 사령관이 즉석에서 대회 참석자들에게 휴가를 보내 주라고 옆의 부관에게 지시를 내렸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잘 하면 이 휴가가 올 현충일 때 걸릴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올 현충일에는 태진이 너를 만나러 가리라.

그런데 이 글을 올리면서 보니 진해에서 받은 상장의 날짜가 서울 사령부에서 받은 상장의 날짜보다 더 늦게 되어 있다. 또, 내 이름의 철자도 가운데 글자가 틀려있다.아마도 진해 행정병의 착오이리라...

270기 김상은 후배님의 제보에 의하면 당시 해병통신교육대장 유창식 소령은 그후 진급하여 1사단 통신대대장(74-75년)을 역임했고
그 다음에는 해군본부 해병 통신감을 지내다 예편했다 한다.

상으로 받은 라디오는 그 당시 서울 서대문 영천시장에서 장사를 하시던 어머니에게 선물했다. 맨위 목차로 가기 라디오보다 더큰 배터리를 고무줄로 묶어서....

터진 상복(^^), 그리고 전역.... 기합 바짝 든 쫄병(1)~! 기합 바짝 든 쫄병(2)~!
통신교육대로 돌아온 나는 완전히 영웅이 되어 있었다.  교육대장이 얼마나 좋아 했는지 그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상급 부대인 상륙전학교에서 경연대회 우승자의 포상휴가 15일을 신청하라는 정식 공문이 왔다. 교육대에서는 행정병 자리를 오래 비워둘 수 없다며 일주일만 다녀오라고 했다. 그래도 좋았다. 야호~! 드디어 귀국 후 처음, 태진이가 떠난 후 처음 맞는 현충일에 태진이한테 갈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너무 기뻤다.

월남에서 철수한 뒤 나는 진해에서 13개월 반가량 근무하면서 매년 실시하는 사격훈련에서는 높은 점수를 얻어 특등사수 메달과 함께 증서를 받았다.
또 모범해병으로 뽑혀 진해 제4비료공장의 견학과 통제부 안의 8인치 포를 장착한 해군 전함을 견학하는 행운도 얻었다.
겉보기에는 이렇게 상복도 많고 그럴 듯 했지만 내무생활은 다른 곳의 생활과 다를 바 없이 고로왔다. 그러나 해병대의 고로운 생활이야 해병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 여기에는 적지 않으려 한다.   그 당시의 해병대 군기는 사진에서 보듯이 내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고참이 사진 한 장 같이 찍자니까 바짝 얼어붙은 쫄병들의 모습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

1972년 여름이 지나갈 무렵,  월남에서 엉터리 드럼을 두둘기며 기타를 치고 하던 219기 윤종태 수병이 너무 그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기수로 보아 지금은 제대를 했을 것이었다. 더욱이 진해에서는 그렇게 멀지 않은 부산이 아닌가?   그때는 서울에 갈 때 부산을 거쳐서 갔었다. 어렵게 찾은 윤종태 수병과 약혼녀 - 부산 태종대 1972년
나는 윤수병을 찾으리라 마음먹었다. 언젠가 휴가 때 부산에서 차를 내려 윤수병을 찾아 나섰다.  아는 거라고는 월남에 있을 때 들었던 이름 석자와 집이 부산 연산동이라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연산동이 넓으면 얼마나 넓으랴, 월남에서 정글을 뒤지듯 샅샅이 뒤지면 찾을 수 있겠지 하는 심정으로 연산동까지는 쉽게 왔으나 막상 찾기 시작하려니 막막했다. 연산동은 지역이 넓어 여러개의 동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먼저 한 동사무소에 들러서 알아보았으나 이름 석자 가지고는 찾을 수 없다고 했다. 나는 한 골목씩 수소문 해 나가기로 했다. 다행이도 그 시절 부산은 요즘과 달리 아파트도 없고 이웃끼리 서로서로 알고 지내던 시절이어서 희망을 갖게 했다.
나는 입이 닳도록 같은 말을 되풀이 하며 동네 곳곳을 누볐다.
"
사람을 찾습니다. 이름은 윤종태이고 해병대로 월남에 갔다 온 적이 있고 올 여름에 제대했습니다. "
이렇게 헤매기를 몇 시간, 드디어 윤수병을 아는 주민이 나타났다. 지성이면 감천... 얼마나 반가웠는지~!  이렇게 해서 월남서 헤어진 지 약 1년 반만에 윤수병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뒤로는 외박이나 휴가때면 윤수병한테 들렀다. 덕분에 서울 촌놈이 부산의 가볼 만한 곳은 다 다녀볼 수 있었다. 해운대, 용두산 공원, 금강 사직공원, 윤수병의 약혼녀와 함께 영도 태종대도 놀러 갔었다.

내가 제대 후 윤수병이 서울 올라와 태진이한테도 같이 가고, 한때 윤수병의 근무지였던 울산에도 내려가고 했었다. 몇 년간은 그래도 연락이 됐었는데 그시절이 워낙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라 어쩌다가 서로 이사를 하는 통에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 그 후 지금까지도 만나지 못하고 있다.
정말 보고 싶다....ㅠ.ㅠ

이렇게 진해에서 근무 하는 중에 월남에서 나머지 부대들이 계속해서 철수해 들어왔다. 이래서였을까?   때아닌 해병대의 조기 전역 바람이 불었다.제대말년~, 교육대 현관 앞인데.. 아마도 공휴일인 듯~~~ 월남서 신던 정글화 되게 아끼네~!  예정 시기보다 앞당겨 전역 명령이 내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월남으로부터의 철수로 인하여 병력이 많아져서 앞당겨 제대를 시키는 것이리라....
그런데 그 혜택이 나한테 까지 돌아올 줄이야~!  나는 훈련소에서 226기 동기 1,115 명중에서 맨 앞에서부터 36번째의 군번을 받았었다.
그 덕택으로 1기 선임 225기가 제대할 때 그 끝에 묻어 같이 제대했다.  
226기는 셋으로 나뉘어 석달에 걸쳐 제대를 했으니 나는 군번이 늦은 동기보다 2개월이나 먼저 제대를 한 것이다.
그때가 1973년 01월 31일, 입대한지 32달 만이었다.

진해 해병통신교육대 1972년말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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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우 재회....

재회 [ 1 ] --225기 최철식--

최철식(225), 함 하사(통신반장), 김태진(226) 지난 2000년 5월 4일 회사에서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네, 신완식입니다.
신수병~! 나 최철식이요~!     누군지 얼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신수병~!  나요, 최철식이란 말이요~!  나 모르겠소?

그제서야  아 !  월남 2대대 6중대에서 같이 근무하던 225기 최철식 수병이었다. 정말 반가웠다. 그러고 보니 목소리가 30년전 그대로였다.

집은 마산인데 그 당시는 하동의 화력발전소 건설현장에서 감리로 일하고 있어서
주말에나 마산 집에 갈 수 있다고 했다.

그 뒤로 여러번의 메일과 전화를 주고받았는데 아직까지 만나 보지는 못했다.

최철식 수병은 월남에 늦게 온 바람에 오자마자 먼저 소대 통신병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대학교 재학중에 입대했다고 했던가??? 중간에 522 고지에 통신병으로 파견되었었다.

귀국 후 그냥 헤어지고 말았는데 30년이 지난 작년 봄에 인터넷에서 내 홈페이지를 우연히 발견했다고 했다.

월남에서 통신반장의 술 취한 집합 때 내가 덮치겠다고 했는데 최수병이 위험하니 하지 말라고 나를 말렸다고 그때의 상황을 기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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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로 전화, 이메일 그리고 게시판 등을 이용하여 연락을 하고 지내면서도 만나지는 못하다가 2005년 3월 30일 드디어 34년 만에 신현기(230기), 오정욱(230기) 수병과 함께 감격의 재회를 했다.
뜻밖에도 그 자리에는 최 수병과 한 직장에서 가까이 지내 오던 6중대 81mm 소속 권영환(228기) 후임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해 현충일에는  최 수병이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마산에서 서울로 올라와 6중대 전우들과 함께 동작동 국립묘지 태진이 한테 갔었다. 여기 를 클릭하면 그때의 자세한 내용을 사진과 함께 볼 수 있다.맨위 목차로 가기


 


재회 [ 2 ]
--230기 신현기--
마리아 성당에서 -- 김태진(226), 신현기(230), 나
지난 2000년 11월 24일 금요일 아침 출근해서 메일을 확인하니, 너무나 반가운 뜻밖의 E-mail이 도착해 있었다. 그 내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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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낸사람: 신일철
제목: 월남에 함께 계셨던 '신현기'씨의 아들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아버님을 위해 The Ventures 노래를 찾다가
우연하게 웹사이트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님이 연락 부탁하셔서 이렇게 메일 드립니다.
011-9920-5xxx
서울 목동에 거주하고 계시며, 김포에서 사업을 하십니다.
아버님이 무척 연락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럼 좋은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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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메일을 읽어나가는 순간 머리가 띠융~! 했다. 이게 꿈인가 생신가??? 신현기라니~!!!  아~! 이럴 수가...
신현기라면 30년전 월남에서 같은 벙커에서 지내며 총알이 흩어지는 틈을 같이 뛰고 구르던 230기 신현기가 아닌가??!!
제대한 직후 한번 본 것 같기도 하고 그랬는데 30년만에 기막힌 우연으로, 그것도 내가 그리도 좋아하는 The Ventures 덕택에 그 신현기의 아들이 인터넷에서 나를 발견한 것이다. 가슴이 쿵쾅쿵쾅했다. 그때부터 계속해서 전화를 했지만 접속이 되질 않았다. 다음날에야 겨우 연결된 전화,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바로 30년전 월남에서 듣던 그 목소리였다. 우리는 다음날 일요일 낮 12시에 동작동 국립묘지 정문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시간 가는 것이 왜 이렇게 더딘지....
일요일 낮 12시, 궂은 비가 부슬부슬 내리다가 막 멎었을 때쯤, 약속장소인 국립묘지 정문앞에서 우리는 극적인 재회를 했다.
마치 625 남북 이산가족 상봉처럼 우리는 만났다. 멀리서도 서로가 알아 보고 손을 흔들며 조금이라도 빨리 보려고 우리는 서로 뛰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것은 우리가 마치 며칠 전에 보고 오늘 또 만나는 것 같은 전혀 낯설지 않은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2002년 현충일 동작동 국립묘지

우리는 서로의 손을 굳게 잡았고, 서로의 얼굴을 보고 또 보고 만져도 보고 하였다. 월남에서 전사한 내 동기 김태진의 묘에 가서 준비해간 진로 소주를 따라 주며 옛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우리는 그날 거하게 취하도록 마셨고, 곧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저녁에 헤어졌다. 꿈만 같은 하루였다. 정말이지 인터넷 화이팅, 홈페이지 화이팅, 그리고 벤쳐스 화이팅이었다~!

2002년 현충일 동작동 국립묘지 - 신현기(230), 나
 

 

 

 

 

 

 

 

 


그 뒤로 우리는 아이들을 데리고 두 가족이 만나기도 했고 지난 현충일에는 두 부부가 국립묘지 태진이 한테도 다녀 왔다.
요즘은 평균 3주정도 마다 한번씩 만나 지난날의 추억을 얘기하며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나와는 성이 같은 "평산 申"이었는데 월남에서는 넉달 쫄인지라 지가 감히 따져 볼 수 없었고, 또 나도 그냥 무시하고 말았는데, 알고 보니 이런,,, 이런... 신현기가 나보다 항렬이 한자리 높은 것이 아닌가???  나는 평산신씨 34대손이고 신현기는 33대손인 것이다. 이럴 수가 ~@.@~ 우린 너무 많이 웃었다...

이런 신현기가 2008년 9월1일 뇌종양으로 입원하여 투병을 하다가 얼마 가지 못하고 다음달인 10월19일 향년 59세로 세상을 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유해는 10월22일 이천에 있는 국립이천호국원에 안장되었다..

국립이천호국원 3구역 03070139호


 

재회 [ 3 ] --226기 강재동, 남정수--

2001년 07월 08일 뜻밖의 반가운 글이 내 홈페이지의 방명록에 올라왔다. 그 내용은, 6중대 2소대소속 강재동(226) - 뒷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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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 남정수
Email     :
kiki3411@yahoo.net

안녕하세요??저는 부산에 살고 학생입니다.
다름이 아니라..저의 아버지게서도 해병대생활을 하셨고. 아저씨와 같은 동기이신데..
고된 훈련과 목숨을 건 전쟁에 참가한 동기를 찾고 계십니다.
그러다 우연히 이 사이트를 알게 되어 아버님과 둘러보니..
아저씨와 같은 226기 해병대 동기생이고, 저의 아버지께서도 통신 유선병으로 월남 2대대에서 활동하시고, 청룡부대 귀국1진 으로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아버지께서 이 사이트를 보시고 무척이나 기뻐하셨습니다.
이름은 생소하시나, 만나뵈면 기억을 되살릴것 같다고 하십니다.
저의 아버지께서는 서울 해병226기 동기생들과 모임을 하시는데.
1년에 2번정도 모임에 참가하십니다. 먼곳에 사시는데도 참가하시는걸 보고 전우애가 이런것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 사이트에 내용을 하나하나 읽으면서 아버님께 자주 듣던 군대 이야기와 월남전에 관한 이야기를 생각하니..너무나 생생하게와
닿았습니다.
아버님께서 아저씨와 연락을 하고싶어 하십니다.
바쁘시지만 연락한번 해주십시오..
(051)441-0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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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즉시 부산으로 전화를 하였고 남정수씨의 아버님을 찾습니다 했다. 그런데 전화를 받은 아주머니가 "뭐라카노?" 하면서 누군가한테 전화기를 넘겨 준 듯 "여보세요"하는 굵직한 남자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또 남정수씨의 아버님을 찾습니다 했다. 그런데 이남자 역시  "뭐라카노?" 하는 것이 아닌가.... 꼭 장난전화 취급하듯이 끊어 버릴 것같은 느낌이라 나는 다급히 소리를 질렀다.
"여보세요, 여기는 서울인데요, 메일을 받고 전화를 하는 겁니다. 남정수씨 아버님 부탁합니다. 해병대 226기요~! "  그랬더니 "내가 남정수요, 혹시 신완식씨 아닙니까?" 하는 것이었다. 내가 맞는다고 하니까 "내가 남정순데 아버지는 왜 찾나?" 하는 것이었다.
결론은 나한테 메일을 보낸 사람은 해병대226기 동기의 아들이 아니라, 남정수의 딸이 메일을 쓰면서 아빠 이름을 사용했기 때문에 이런 혼동이 있었던 것이다.
남정수는 부산에서 부인과 함께 식당을 하고 있다고 했는데 서울 226기 동기회의 모임에 일년에 두 번 참석한다고 했다. 대단한 정성이 아닐 수 없다. 이번 7월 모임에 서울로 올 테니 나보고 꼭 나오라고 했고 나도 꼭 가겠다고 했다.
2001년 07월 26일 동기회 모임에 나갔다. 모임날짜는 매월 26일이란다. 왜? 226기 모임이니까^^ 그날 모두 약 20여명이 모였다.
모두들 모르는 얼굴들이지만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남정수가 부산에서 올라와 있었는데 어렴풋이 낯이 익었다. 그것은 월남에서 본 기억 때문이 아니라 월남으로 가기 전 4주간의 통신교육대에서의 기억이었다. 그날 모인 동기들 중 놀랍게도 월남 2대대 6중대 2소대에서 근무하다 같이 철수한 강재동(사진참조)을 만날 수 있었다. 강재동은 내가 낯이 익다고 했다.  또 그날 참석한 박제일은 월남에서 한쪽 팔을 잃어 의수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날 2차, 3차 밤늦도록 마셨고 나는 술김에 남정수와 함께 이영화의 집으로 가서 한잔 더 했다. 그러다가 필름이 끊겼는데 눈을 떴을 때는 우리집 안방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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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회 [ 4 ] --226기 양선우-- 통신제2벙커앞에서 뒤가 양선우(226), 앞이 나

2002년 09월 07일, 그날은 한달에 한번 회사를 나가지 않아도 되는 첫째 토요일,
집에서
PC에 밀린 일들을 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휴대폰에서 경쾌한 해병대 곤조가 (내 핸드폰 벨소리)가~?????

악~!!!! 30년도 더 전에 월남에서 한 벙커에서 지내던 226기 동기가 아닌가???? ~@@.@@~

이름은 양선우, 고향은 충북 미원....

건대부속 민중병원 전기실에 근무한다고 했다, 아니??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
내가 사는 곳이 강동구 성내동인데 양선우는 같은 서울, 그것도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이다.
어찌나 반갑던지 단숨에 지하철을 타고 병원으로 찾아갔다. 와~ 모습도 목소리도 옛날 그대로였다, ~@.@~
그 친구는 오히려 나보고 머리색 말고는 변한 것이 없다고 했다. ㅎ ㅎ ㅎ 그냥 하는 소리겠지....

요즘 민중병원 자리에 새로 도로가 날 계획이라 그옆에 새로 병원을 짓느라고 그 현장에 전기실 인원을 빼앗겨 24시간 2교대로 근무하느라 오늘은 자리를 비울 수가 없다고 했다.
아쉽지만 한잔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월남에서의 생활을 회상하며 많은 얘기를 주고 받았다.

그 친구는 내가 기억 못하는 여러가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내 해병대 추억록의 수정, 보안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집에 돌아오니 아련한 옛 추억에다 묘한 상념이 겹쳐 때마침 TV에서 중계하는 남북 축구도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우측 사진은 딱 하나뿐인 그 친구와 월남에서 찍은 사진이다.

넘넘 째지는 날이었다~!!!!!!!
맨날 이런 일만 생겨라~~~~~~~~~~~아~~~ㅇ

 

재회 [ 5 ] --219기 윤종태--


2002년 09월 19일, 다음날이 추석 연휴 첫날이라 회사에서 오후 일찍 끝내 주었다.
오후 일지감치 집에 들어와 메일 확인을 하는데 ~~~~@@@@ 이런, 이런@@@@~~~~
이럴수가???? 그렇게 찾아 헤맸던 월남에서 같은 벙커에서 생활했던 219기 윤종태 수병의 글이
내 홈페이지의 방명록에 올라와 있는 것이 아닌가???~@@.@@~ !!!!!!

2002. 9.19 (15:34) from '211.197.166.84' of '(null)'
Name 윤종태
E-mail yjt0315@kebi.com
Comments 홈피 쥔님
나 219기 울산 촌놈이다
간간히 자네 얼굴이 생각나기도 했는데 지은죄가 맘에 걸려서
찾아볼 엄두를 못냈다 어려운시절 오래된얘기지...
서울에서 동기모임이 있다고 연락이 와서 아참 나도해병이였지?
하고 옛날을 더듬어보니 역시 자네생각이 젤먼저 나더군
자세한사연은 이맬로 보낼께 홈귀경 잘하고 간다.

이게 꿈인가 생신가 했다.... 그러나 방명록의 글에는 전화번호가 없었다. 단지 메일 주소만 있었다.
이럴 때 전화번호라도 적어 놓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면서도 급한 마음에 내 전화번호를 넣어 메일을
얼른 써서 보내고, 2년전 만난 230기 신현기한테 전화를 했으나 그날따라 받지 않았다.

아래 글은 이때 윤수병한테 내가 보낸 메일의 내용이다.

===================================
여러가지 할 말 일단 때려 치우고, 이게 누궁교?
이게 꿈잉교, 생신교?????

정말 반갑습니다~!  형수님도 안녕하신지요???

지금까지 울산에 계셨다니 부자 되셨겠네요^^^^^^
정말 믿기지 않습니다. 제가 선배님 찾으러 혹시나 하고
인터넷을 얼마나 헤매고 다니는 줄 아십니까?
30년전에 부산 연산동 돌아다닌 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래서 사람이 거짓말이나 뻥을 치면 안되는 겁니다.
제가 제 홈에 해병대 추억록인
더 잊어버리기 전에... 의 내용에
거짓이 있다면 이렇게 단번에 들통나지 않겠습니까?

이젠 할아버지 다 되셨겠네요,,,

전 내일 월남 전우 230기 신현기와 226기 양선우 하고 동작동 국립묘지
김태진이한테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제 동기 양선우는 지난 09/07일 30년만에 만난 월남 전우입니다.
태진이가 죽은 후에 그 대타로 왔으니 윤수병님은 모르실 겁니다.
오늘따라 신현기가 전화를 안받는군요.

그건 그렇고 메일 언제 줄겁니까????
얼른 목소리라도 듣게 전화 번호 주이소~! 아니면 전화를 하든지요~~~~~!!!!!

 

제것은, 집: (02)474-****
  
      회사: (02)949-****
     핸드폰: 018-225-****

입니다.

빨리요~!!!!!!!!!!!!!!!

필승~!

신완식 드림
im1@im1.pe.kr
http://www.im1.pe.kr

========================================

다음날(09/20일) 15:00 에는 2년전에 만난 월남전우 230기 신현기와 2주전(09/07일) 32년만에 만난 226기 동기 양선우와 동작동 국립묘지에 있는 김태진이의 묘에서 만나기로 한 터였다.
그런데 이렇게 기쁜 일이 일어 날 줄이야^^^^@@@@

신현기한테는 연락이 안되고, 이 기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안절부절하면서 윤수병한테서 연락이 오기만 기다렸다.

다음날 드디어 윤수병한테서 전화가 왔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윤수병은 지금 울산 현대자동차에서 중장비... 뭐... 라고 했는데 잘 모르겠고~@.@~.

그 뒤로 계속해서 메일과 전화로 서로의 만남을 기뻐하고 있다.
하루빨리 만나보고 싶지만.... 서울과 울산이니 쉽지는 않을 듯하다....

오른쪽 사진은 최근(2002년12월29일)에 윤수병이 메일로 보내준 월남 근무때의 사진으로 맨 왼쪽의 검정 옷이 윤수병이다.  

윤 수병을 보고싶은 마음을 주체할 수 없는 신현기와 나는 결국 하루 날을 잡아 울산에 가서 윤 수병을 만나기로 하고 고속버스표를 예매했다. 며칠 전부터 윤 수병에게 연락을 하고 한 끝에 드디어 2003.03.01 07:00 우리는 울산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낮 12:00 울산 도착예정이 대구 근처에서 정체되는 바람에 오후 1시가 다 되어 돼서야 도착했다. 울산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윤수병이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빗속의 해후.. 어찌나 반가운지.. 그때의 감정을 글로는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윤수병은 약간 살이 찐것을 빼고는 옛 모습 그대로였다. 윤수병은 터미널에서 멀지않은 곳의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아파트에서는 그 옛날 내가 제대하기 전에 부산에 놀러갔을 때 여러번 보았던 윤 수병의 부인(형수님이라 불렀다)이 우리를 반겼다. 형수님도 옛모습 그대로였다. 우리는 형수님의 정성이 잔뜩 담긴 진수성찬을 거하게 먹고 마시며..~@.@~..ㅎㅎ 그 옛날 월남전 이야기, 부산 연산동을 뒤져 윤 수병을 찾아냈던 이야기..등등..으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월남 6중대시절 작전중 임종린 중대장이 크게 다쳤을 때 윤 수병도 뭔가에 무릎을 맞았는데 대수롭지않게 여겼다가 30년이 더 지난 얼마전에 점점 많이 부어올라 뒤늦게 수술을 받았다는 흉터도 보았다. X-Ray사진에 작은 흰점 3개가 보여 수술로 제거했는데 그것은 잘게 부숴진 돌가루였다고 했다. 아마도 폭발시 작은 모래알 한개가 날아들어 뼈에 부딪치면서 세조각으로 부숴진 것이리라.. 그때 맞은 것이 좁쌀 만 한 모래알이 아니라 굵직한 돌이었다면 윤 수병 다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시간은 빨리도 지나 어느새 5시가 가까워 왔다. 서울로 돌아가는 고속버스를 5시로 예매했기 때문에 우리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윤 수병은 아들만 둘인데 둘째가 해병820기라고 했다. 이 둘째가 터미널까지 우리를 차로 태워 주었다. 터미널에서 우리는 오는 현충일에 서울에서 만날 것을 기약하며 아쉬운 작별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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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회 [ 6 ] --6중대 중대장 임종린 (먼 훗날 1992년 제20대 해병대사령관 역임) --

2003년 02월 10일 뜻밖의 메일을 받았다.그 내용은,

보낸사람  임철택 <clim@bh.knu.ac.kr>
2003년 2월 10일 월요일 오후 3:30

제목  안녕하세요? 신완식님의 홈페이지를 보고 연락드립니다

신완식님 안녕하세요?
님의 홈페이지를 보고 임종린(저의 아버지)님께 말씀드렸습니다.
  1. .....더 잊어 버리기 전에.... [ 현재창 ] [ 저장된 페이지]
    ..팔을 심하게 다쳤다. 바로 중대장 옆에 있던 나는 구사일생으로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다.[[실전중 나도 모르게 찍힌 사진 4장중의 하나]] 임종린 중대장이 왼쪽팔을 다친 채로 작전을 지휘하고 있다.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안'은 미군 앵글리코맨의 연락으로...
아버지께서 꼭 연락을 바란다고 전해드리라고 해서 메일을 보냅니다.

부탁합니다. 아버지 전화번호와 이메일 주소는
011-722-1784,
limrokmc@hanmail.net   입니다
부탁드립니다....

경북대 임철택


이게 왠일인가? 바로 월남 2대대 6중대 중대장의 아들의 메일이 아닌가??
곧이어 내 홈페이지의 게시판에도 같은 글이 올라왔다.


Written by 임종린 ( limrokmc@hanmail.net) Hits: 53 , Lines: 9
20대 해병대사령관 아들입니다
반갑습니다. 제가 우연히 인터넷검색을 하다가 신완식님의 홈페이지를 보고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꼭 신완식님을 비롯해 6중대 전우들의 소식을 알고 싶다고 하시더라구요.
아버지의 메일과 함께 전화번호를 남겨놓을테니 6중대 전우님들중에 연락이 되시는 분들이 계시면 아버님께 연락바랍니다. 아버지의 기억으로는 신완식님께서는 무전병으로 신병이었다는 희미한 기억밖에 없으시다고 하시더군요.
무척 연락을 기다리는 것 같으니 다른 전우분들께서도 연락바랍니다.
limrokmc@hanmail.net
011-722-1784
6중대출신 20대해병대사령관
임종린
Prev : 오랫만입니다.
Next : Re: 필승~! 해병226기 신완식, 옛 중대장님께 인사드립니다~!
February 10, 2003 (15:59)
CrazyWWWBoard 98 Professional Edition II


임종린 중대장은 내가 1970년 파월되어 청룡 제2대대 6중대로 배치받아 갔을 때 6중대 중대장이었다.
작전중 동행했던 월남인 이 옆에서 부비트랩을 밟아 발목을 잃을 때 임종린 중대장은 왼쪽팔과 왼쪽 다리를 크게 다치고도 후송을 마다하고 작전을 끝까지 지휘해서 기억이 생생한 바로 그 중대장이다.

나는 즉시 전화를 걸어 통화를 했다. 33년이 지났는데도 낯익은 목소리였다. 제20대 해병대사령관을 끝으로 예편하신 후 약 5년간 대학교에서 사회학 강의도 하셨고, 젊었을때부터 시 짓기를 즐기셨는데 2000년에는 아예 문단에 등단하셔서 시와 소설로 문학 활동을 하고 계신다고 했다....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니 그뿐만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 왕성한 사회활동을 하고 계셨다.
그날 저녁 내가 아는 모든 6중대 전우들한테 메일을 띄우고, 게시판에 답글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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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회 [ 7 ] --230기 오정욱--

2004년 5월.. 230기 신현기가 최근에 오정욱이라는 230기 동기와 연락이 닿았는데 그 동기가 월남 2대대 6중대에서 근무를 했었고 태진이의 사고내용도 잘 알고 있다고 알려왔다. 그리고 그 동기가 서울에 살고 있고 이번 현충일에 동작동 국립묘지에 가고싶어 한다고 했다.
이름은 전혀 기억에 없지만 월남전우를 또 한명 만나는구나 하고 은근히 기대를 품고 현충일에 국립묘지로 갔다.
태진이의 사고에 대해 매우 잘 기억하고 있다고 하여 더욱 내 관심을 끌었다.. 2004년 현충일 동작동 국립묘지 - 왼쪽부터 (230)오정욱, 나, 마누라, (230)신현기

이름은 기억에 없어도 직접 만나면 알 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약속된 시각 15:00 에 태진이한테 갔다.

멀리서 태진이 묘로 다가가면서 보니 신현기와 또다른 사람이 함께 있었는데, 저 사람이 오정욱인가보다 하고 다가가니,,,, 이런, 이런,, 그냥 바로 알아볼 정도로 낯이 익었다. 그 친구도 나를 한눈에 알아보고 매우 반가워 했다..
이렇게 해서 33년 만에 월남전우를 또 한명 만날 수 있었다.

오정욱 후임은 6중대 2소대에 얼마간 있다가 화기소대로 옮겼었다고 했다. 지금은 강남 대치동에 살고 있으며 노래방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가지고 간 오리지날 진로 소주를 태진이한테 따라주며, 마시며 옛 이야기로 시간가는 줄 몰랐다.

이번에 오지 못한 울산 219기 윤종태 수병의 잔도 대신 올렸다..

오정욱 후임의 대단한 기억력 덕분에 기억이 나지 않던 여러가지 사건들을 들을 수 있었다.. 들으면 들을 수록 감회가 더해졌다..
태진이와 헤어져 나오면서 반포에서 거하게 저녁식사를 하고 헤어졌다. 식당에서 신현기가 참전용사라고 익살을 부려 소주 한 병을 서비스로 받아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기도 했다..ㅎㅎ

오정욱 수병의 기억력 덕분에 이 수기의 잘못된 부분을 정정하고 또 내용을 추가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그날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지만.. 줄곳 내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 있었다. 화분이었다. 태진이의 화분에 나라에서 제공하는 기본적인 꽃만 꽂혀있는 것이었다. 30년이 훨씬 넘은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는데.. 무슨 일일까? 그러고 보니 기억이 확실치는 않지만 작년 이때에도 그랬던 것 같기도 했다.. 혹시 태진이의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것은 아닐까?..
내가 막내인데 우리 부모님께서 모두 돌아가신 것이 8년 전이었으니, 태진이가 맏이라 해도 이젠 그럴 때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태진이 동생들은 오지 않는구나.. 형제들의 마음이 어찌 부모 마음과 같으랴.. 그래, 다음부터는 태진이 부모님을 대신해서 내가 예쁜 꽃을 꽂아주마.. 하고 다짐했다.

즐겁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가슴이 찡~ 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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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회 [ 8 ] --81mm 반장 오성곤(하47기)--

2005년 08월 21일 뜻밖의 반가운 전화를 받았다. 이름은 오성곤, 6중대 2소대 2분대장으로 7개월 지내다가 대대에서 81mm 박격포 교육을 받은 후 6중대 81mm 반장으로 귀국 때까지 근무했었다고 했다. 지금 울산에서 살고있다고 했다. 당장은 이름과 얼굴이 생각나지 않았지만 사진을 우편으로 받아 스캔하고, 앨범의 사진을 스캔하여 게시판에 올려 확인하고 하는 어려움 끝에 결국 이름과 얼굴을 합칠 수 있었다.. 정말 반가웠다. 역시 울산에 살고 있는 윤종태(219기) 수병을 소개주었는데 서로 연락하여 재회를 했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직접 만나지 못하는게 아쉬웠었는데 드디어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울산의 윤 수병의 둘째 아들이 2005년 11월 13일 오후 3시에 수원의 예식장에서 결혼을 한다는 청첩이 왔는데, 오 반장이 울산 하객용 관광버스편으로 올라온다는 것이었다. 신현기와 연락하여 수원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나는 하필 같은 날 오후 1시에 인천에서 처조카 결혼식이 있기에 먼저 인천으로 가서 눈도장을 찍고 잽싸게 튀어 수원으로 달려갔지만 수원 예식장 도착이 3시였고, 4시에 출발한다던 울산 하객을 태운 관광버스가 울산으로 막 출발한 뒤였다. 오 반장이 탄 빨간 버스 지붕이 저기 멀어져 가는 것이 보였다. 발을 동동 굴렀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신현기는 나보다 조금 일찍 수원에 도착하여 출발직전에 버스에 올라 오 반장을 만나 볼 수 있었다는데 서로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다고 했다.. 나는 오 반장과 핸드폰으로 아쉬운 작별 인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날 신현기와 함께 윤 수병의 동기 219기들의 뒤풀이 장소에 갔다가 엄청난 고문(?)을 당했고 거하게 한잔 하고 서울로 돌아와서 한잔 더하고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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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회 [ 9 ] --통신반장 반덕주 하사(단기27차)--

2011년 01월 31일 깜짝 놀랄 이메일을 받았다. 통신반장 반덕주 하사의 딸이 보낸 것이었다.

보낸사람  반현진 <sihoo222@gmail.com>
2011년 1월 31일 월요일 오후 12:00

제목  반덕주씨딸입니다 글중 아빠이름이 보여서 내용을 아빠한테 읽어드렸더니 아빠가맞다고 하셔서요

연락바랍니다


40년 전 월남에서
반납해야 할 COI를 소각해 버리고 나서는 처벌이 두려워 술을 마시다 너무 지나친 나머지 그만 이성을 잃고 우리를 집합시켜 죽음의 공포로 몰았었던 바로 그 통신반장 반덕주 하사, 죽어도 잊지 못할 바로 그 통신반장의 소식을 그 딸이 알려 온 것이었다.

즉시 답신으로 내 전화번호를 보내 통화를 청했다. 얼마후 반 반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옛날 목소리 그대로였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인천 가좌동에 살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가까운 곳에?? ㅎㅎ  하루라도 빨리 만나고 싶어 03/05일 오후 1시에 남영역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묘한 상황이~@.@~   아래 내용은 내가 반 반장의 딸에게 보낸 이메일의 내용이다.

보낸사람  신완식 <im1@im1.pe.kr>
2011년 3월 19일 토요일 오후 11:25

제목  Re: 반덕주씨딸입니다 글중 아빠이름이 보여서 내용을 아빠한테 읽어드렸더니 아빠가맞다고 하셔서요

얼마전에 따님의 메일을 받았던 반덕주 씨하고 1971년도에 월남에서 함께 근무했었던 신완식입니다.

몇가지 궁금한 것이 있어 이렇게 따님한테 메일을 보냅니다.

반덕주 씨는 월남에 있을 때 중대 통신반장이었습니다. 저는 통신병이었구요..
이제부터는 반장님이라고 호칭하겠습니다.

지난번에 따님에게 제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난 뒤 얼마 후 반장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어찌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일단 만나기로 하고 시각, 장소를 정했습니다.
03/05일 13:00시 남영역에서 만나기로 했지요..

그때까지 저는 그당시 월남에서 같이 근무했던 소대장님과 전우들과 연락을 하여 가능한 한
많은 전우들과 만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를 포함하여 3명이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약속 전날에 확실히 하기 위하여 반장님께 전화를 했더니 이런,, 약속사실을 전혀 모르고 계시더라구요..

무슨 말이냐, 내일(5일) 오후 1시에 남영역에서 만나기로 했지 않았느냐 하니까 반장님은 뭔가 횡설수설,,
내가 정신이 왔다갔다 한다느니, 2년 전에 암 수술을 받았다느니, 관절이 아파서 못 간다느니..
하시더군요.. 오히려 제가 정신이 멍~ 해졌습니다.

할 수없이 내일 약속은 안되겠고 다음을 기약하자고 하고 일단 전화를 끊었습니다.

소대장님과 전우들한테 이런 사실을 얘기하니 참으로 딱한 일이라고 하면서 반장님의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으니 그렇다면 언제 시간을 내서 우리가 인천으로 직접 가서 만나자고들 하더군요..

해서.. 일단 반장님의 몸 상태가 어떤 지 몹시 궁금합니다.. 또 반장님이 늘 집에 계신 지,
주말에 가면 만날 수 있는지.. 등등.. 에 관해 알려 주세요..

반장님이 사시는 곳 주소도요, 기다리겠습니다~!

 

얼마후 딸과 전화통화를 했는데 반 반장은 암수술에 뇌경색이 겹쳐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무릅관절이 몹시 상해서 외부 나들이가 어려운 상태인데 그래도 부천으로 오신다면 만날 수는 있다고 하더군요..

이런 내용을 월남전우들에게 전달하고 언젠가 한번 찾아가 보기로 했으나 생각같이 쉽지가 않았다.

2012년 6월 현충일이 다가오자 매년 그랬듯이 월남전우들에게 소집 전통을 띄워 현충일에 동작동 국립묘지로 모였다. 올해에는 김동명 소대장님과 양선우, 오정욱 그리고 나 이렇게 4명이 모였다.

태진이 묘에 참배를 하고 음복을 하고 둘러 앉아 얘기 중에 반덕주 반장의 얘기가 나왔다. 몸상태가 스스로 바깥 나들이를 할 수 없다니 우리가 찾아 가보자는 쪽으로 얘기가 흘렀다. 얘기가 나온 김에 오늘 당장 가자는 오정욱 수병의 의견에 내가 동참하기로 했고 소대장과 양선우는 선약이 있어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그 자리에서 소대장은 못 가는 대신 금일봉을 내 놓았다^^.

오 수병과 나는 일행과 헤어져 그길로 지하철을 타고 부평역에서 내려 반 반장이 일러준대로 택시를 타고 가좌동 홈플러스에서 내렸다. 근처 가게에서 세상에서 제일 큰 수박을 한 통 사 들고 주변을 둘러보는데,, 저기 길건너에 서있는 반 반장을 멀리서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길 건너에 제법 규모가 큰 식당이 있었는데(상호: 한식부페) 반 반장 부인이 운영하는 것이라 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40여년 전의 추억을 더올리며 많은 얘기를 나눴다. COI를 태웠던 얘기는 물론이다. 그때 보안대로 끌려가서 많이 얻어 맞았다고 했다.. 반 반장은 암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고 뇌경색 증상이 있어 정신이 오락가락 하며 또 무릎관절이 좋지 않아 한쪽 다리를 절룩이며 걸었다.. 그때의 후유증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인의 말로는 웬일인지 그날따라 반 반장의 몸, 정신 상태가 최고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다시는 못 볼 것 같았던 반덕주 반장과 40여년 만에 재회를 하고 돌아왔다. 반 반장의 몸상태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마도 이제 더 이상의 월남전우를 만날 수는 없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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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은 전우들....

208기 백운식...백운식(208) 김태진(226) 최철식(225) --마리아 성당 .
서울 본토박이, 내가 월남 6중대에 갔을 때 중대 통신반 병중에서 두 번째 고참이었다. 항상 일가친척 없는 서울 양동의 양아치라고 큰소리를 쳤다. 특별한 기억은 언젠가 월남에서 부재자 투표를 했는데 (무슨 투표였는지는 ???) 투표가 끝나고 얼마 후에 중대본부로 불려갔다가 돌아오더니 코에서 뜨거운 열기를 코뿔소처럼 씩씩~ 내 뿜으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기억이 잘 안 나지만 그때 무언가 반대쪽에 찍었거나 아니면 박정희가 아닌 곳에 찍은 것이 분명했다. 그 시절에는 그런 때였다. 그런 고참을 보며 우와~ 대단히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210기 백재만....
208기 백수병과 단짝으로 아주 재미있게 지낸 그다음 고참이었다. '71년 5월 말의 대 전투 때 그 난리치던 상황에서 푼돈 모아 산 카세트 녹음기로 그날의 생생한 실제 교전 상황의 소리를 녹음했다. 거기다 마이크에 대고 소리를 질러 효과까지 더해서 녹음했다.  그 테이프 지금도 가지고 있을까???
언젠가는 통신제1벙커옆에 모아둔 105mm 장약 더미에 불이 붙은 적이 있었는데 햇빛을 가리기 위해 쳐놓은 후라이를 태우고 불길이 높이 솟아올라 모두가 놀래서 우왕좌왕하는 중에 바로 이 백재만 수병이 155mm 포통의 물을 끼얹어 가볍게 끈 적이 있었다. 보기와 달리(?) 상당히 침착한 고참이었다.

225기 박삼례....
월남에서 2대대 6중대에 나와 같이 배치받았던 나보다 1기 선임이다.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에 아주 착한 사람이었다. 고향 ㅂㅇ친구인 3소대장한테 엄청나게 당했던 장본인이었다. 제대 후 그 악독한 친구에게 복수는 잘 했을까?? 그런데 아무리 뒤져도 박삼례수병의 사진은 나한테 하나도 없다. 왤까???? 맨위 목차로 가기
 

후기....

긴 글을 끝까지 읽어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40여년전의 진귀한 경험들을 아무런 기록없이 오로지 사진 몇 장과 기억에 의존하다 보니 너무나 답답합니다.
날짜, 사람 이름, 지명, 작전명 등등 기억해 낼 수 없는 부분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뒤늦게 재회한 전우들한테도 물어 봤지만 그들 역시 기억을 해내지 못하더군요...
그래도 기억이 되살아나거나, 새로운 자료가 입수되는대로 수정 보완하고 있습니다.
하오니 가끔 들러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물러갑니다.

필!승!!

해병 226기 신완식 올림.

6중대 OP옆에서 바라본 1번 철로를 달리는 기차.(2000년 12월)

잡초에 둘러 쌓인 6중대 OP.(2000년12월)
 이 사진들은 2000년 12월에 베트남 여행을 갔다가 일부러 6중대 방석 주변을 둘러보고 온 223기 신재화 수병이 찍어온 6중대 방석 사진이다.
정말 귀한 사진을 보내 준 223기 신재화 수병한테 감사드린다. 

[ 위 ] 6중대 OP 옆에서 북서쪽으로 내려다 본 것인데 그때는 없었던 기차가 달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이 기차길이 사이공 <--> 하노이를 잇는 1번 철로이다.
그때는 베트콩들이 레일을 군데군데 떼어다가 산으로 옮겨 동굴을 구축하는데 사용했기 때문에 기차가 다닐 수가 없었다.
사진에 보이는 철길 왼편으로 좀 더 들어가면 VC시장이라고 불렀던 매우 위험한 늪, 정글지역이 있었는데 그곳으로 작전을 여러번 나갔었다.
작전중 월남인 정보원 이 부비트랩에 한쪽 발을 잃고, 부면장의 한쪽 눈알이 빠지고, 임종린 중대장이 팔과 다리를 크게 다친곳이 바로 이 VC시장으로 이동할 때였다.

[ 오른쪽 ] 잡초에 둘러 쌓인 6중대 OP. 6중대 방석은 예전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프랑스군이 사용하던 요새였다고 했는데 그중 OP는 아주 견고하게 지어져 있었다.
OP는 45미터 되는 고지의 정상에 위치했기 때문에 서쪽 산악지역 방향을 빼고는 상당히 먼 거리까지 관측이 용이했다. OP 맨 위에는 대인 레이다가 설치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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